유대전쟁 제4년 동전 : 서기 69-서기 70
앞면 : 진주로 장식된 성배 주위로 "시온의 해방을 위하여"란 글귀.
뒷면 : 초막절에 필요한 대추야자 가지(룰라브)와 양쪽 두 개의 레몬(에트로그) 주위로 "제4년"이란 글귀
유대전쟁은 서기 66년 경 열심당원들이 주도적으로 일으켰던 유대인의 첫 번째 독립운동으로, 73년 마사다의 함락과 함께 종결되었다. 이 때 967명의 열심당원들이 로마군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기들 스스로 자결하였고, 70년 베스파니우스의 아들 티투스는 자기 휘하 8만의 노련한 로마 군사들을 이끌고 총공격해 들어왔고( 아브(7-9월)월 9일, 느브갓네살 왕이 서기전 586년 솔로몬 성전을 파괴한 날과 같은 날(렘39:2) ), 이 전쟁으로 대략 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고, 생존자들은 외국에 노예로 팔려갔다.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누가복음21장20-21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하여 도성 밖 예루살렘 북쪽으로 60마일 떨어진 펠라(Pella)로 피신, 유세비우스(Eusebius)의 '교회의 역사(The History of Church)'에 따르면 그때 교회에는 15명의 주교가(모두 유대인들) 있었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거나 펠라에서 돌아와 있었다. 그들은 야고보의 시대 때부터(행15장) 두 번째 유대의 독립운동 때까지 교회를 인도했다. 로마 공격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무리는 그들을 배신자로 취급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기독교의 어머니' 도시일 수 없었다. 이 후로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믿지 않는 유대인 형제들과 상당히 거리가 멀어졌고,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 이방인의 도시들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