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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지중해 동쪽 해안의 이스라엘·요르단·이집트로 둘러싸인 지역. 면적 요르단강서안 5800㎢, 가자 365㎢

인구 307만(2000)
인구밀도 490.6명/㎢
수도 라말라(임시행정수도)
주요언어 아라비아어
종교 이슬람교·그리스도교
통화 이스라엘 셰켈(NIS)
환율 1달러=3.231NIS(1998.1)
국민총소득 46억 달러
(1999) 1명당 1574달러
무역수지 수출 3억 8052만 달러
(1997) 수입 21억 6400만 달러

지중해 동쪽 해안의 이스라엘·요르단·이집트로 둘러싸인 지역. 지중해 연안의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으로 되어 있다. 면적은 요르단강 서안 5800㎢, 가자 365㎢. 인구는 331만 1000(2001). 수도 예리코.
지형은 동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진 예루살렘 북부지역에서 23㎞ 떨어진 곳에 해면보다 약 400m가 낮은 사해(死海) 연안지대가 있어 지형적으로 급한 대조를 이룬다. 동쪽 가장자리에 남북으로 뻗은 요르단지구대는 너비 10∼20㎞의 대함몰대(大陷沒帶)로서, 티베리아스호와 사해가 가로놓여 있고 이것들을 연결하여 요르단강이 남류한다. 중앙부에는 주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제 3 기 습곡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다. 기후는 겨울에 비가 내리는 온화한 지중해성기후로 연평균강우량은 500∼600㎜로 내륙인 동쪽으로 갈수록 줄어든다. 예로부터 농업지역으로 과수재배가 유명하다.

구석기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지역으로 북쪽의 카르멜산에서 출토된 네안데르탈인형(人型) 및 호모사피엔스형 화석인뼈는 인류의 진화를 보여주는 표본으로 잘 알려져 있다. BC 15세기 무렵 이집트가 정복한 뒤 가나안인이 이곳을 차지하였으며 BC 12세기 이후해양민족 필리스티아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렸다. BC 11세기에 헤브라이인들이 이스라엘왕국을 건설하고 다윗왕 때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였다. 이어 솔로몬시대에 관료국가제도를 확립하고 번영을 누렸으나 솔로몬이 죽은 뒤 BC 10세기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대의 두 독립왕국으로 분열되었다. BC 8세기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BC 6세기 유대는 신바빌로니아에 멸망당하였다. BC 538년 페르시아의 퀴로스 2세가 포로들에게 고국으로의 귀환허가를 내림에 따라 유대인 약 4만 명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다. BC 4세기 알렉산더스대왕의 통치를 받았고 BC 1세기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637년 이슬람교 아래단결한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한 이후 십자군의 점령을 거쳐 16∼20세기 초에는 오스만제국이 점령하였는데 주로 이슬람교도의 지배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오면서 팔레스타인은 예로부터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의 성지(聖地)가 함께 있는 복잡한 종교적 지역이 되었다. 터키령이었던 팔레스타인은 제 1 차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으나 시오니즘에 의한 유대인의 이주가 계속 증가하자 아랍인의 유대인 배격운동이 격화되었다. 특히 전쟁중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모순된 2가지 선언 즉, <후세인-맥마흔협정(1915)>과 <밸푸어선언(1917)>을 발표함으로써 아랍과 유대인의 사이에는 복잡한 <팔레스타인 문제>가 발생하였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계속 이주, 미국의 지원을 받아 1948년 이스라엘을 건설함으로써 이후 여러 차례 중동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주변 아랍국들의 정규군이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하면서 벌어진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UN의 원래 분할안보다 50% 정도가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 72만 명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이스라엘을 떠나 주변 아랍국가들에서 난민생활을 하게 되었다. 48년 제 1 차중동전쟁 결과 팔레스타인이라는 명칭은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독립국 이스라엘, 요르단 점령의 요르단 서안지구, 이집트 점령의 가자지구(제 3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의 3개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후에 웨스트뱅크로 알려진 요르단 점령지역은 67년 가자지구·시나이반도·골란고원·동예루살렘과 함께 이스라엘에 점령되었으나 79년 캠프데이비드협정에 따라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되돌려 주었다. 그러나 1948년 중동전쟁 이후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계속 증가하였고 이들은 조상들이 살았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강렬한 소망이 있었다. 64년 이후부터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통일적 모체로 하여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73년 제 4 차중동전쟁을 계기로 아랍세계의 석유전략과 결부됨으로써 PLO의 해방운동은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요르단은 요르단강 서쪽 연안에 대한 PLO의 주권을 인정하고 75년 UN은 팔레스타인의 자결권과 PLO를 준국가(準國家)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82년 6월 이스라엘군이 PLO군사세력을 일소할 목적으로 레바논 남부를 침공하여 PLO는 아랍 8개국으로 분산하였다. 87년 이스라엘점령지 가자에서 대규모 반이스라엘투쟁이 발생하였다. PLO는 88년 11월 1947년의 유엔팔레스타인분할안에 근거해 팔레스타인 국가수립을 선언하였다. 이어 아라파트 의장은 미국이 요구한 이스라엘 승인, 테러 포기 등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하였다. 93년 9월 워싱턴에서 아라파트 의장,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가 팔레스타인잠정자치(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에서의 선행적 자치 실시)선언에 조인하였다. PLO반주류파의 반발이 있었지만 94년 5월 양 당사자는 자치협정에 조인하였다. 95년 9월에는 팔레스타인자치확대협정(서쪽 연안 6도시 등에 대한 자치)에 조인하였다. 이어 국제연합과 주요 국제기구는 PLO를 팔레스타인인의 유일정통대표로 인정하였다. 96년 1월 20일 실시된 팔레스타인 자치총회에서 아라파트 의장이 자치행정부대표(대통령)로 당선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팔레스타인인은 아랍 각국으로 흩어져 94년 세계의 팔레스타인인은 약 580만 명으로 추산된다. 가자지구에는 96만 3000명, 서쪽 연안에는 동예루살렘을 포함해서 약 157만 명(96년 11월 자치정부조사)의 팔레스타인인이 130곳 이상 유대인입식지의 10∼13만 명의 이스라엘인과 혼거하므로 96년 6월 자치정부가 정식발족한 뒤 자치구 각지에서 팔레스타인 경찰·주민과 이스라엘군이 충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97년 1월 이스라엘은 헤브론철수에 합의, 이스라엘군의 부분철수가 완료되었다. 94년 출범한 팔레스타인자치정부는 당초 예정대로라면 99년 5월에 독립국을 세웠어야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강경책에 밀려 자치기간을 1년 연장, 2000년 9월 독립국을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나 2000년 들어 다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은 관계가 악화되어 곳곳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협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팔레스타인은 9월 13일 독립을 선포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강경하게 반발하였으며 팔레스타인지역의 평화는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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