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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키아

지중해 동안(東岸)의 한 지방에 대한 고대지명.

지중해 동안(東岸)의 한 지방에 대한 고대지명. 또한 그 지방의 여러 도시를 거점으로 하여 해상교역에 종사한 민족을 가리키기도 한다. 시대에 따라 지리적 범위가 달라지나 일반적으로 북쪽의 엘레우테로스강으로부터 남쪽의 가르멜산 부근까지 이르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있는 가늘고 긴 지대를 가리킨다. 주요 도시는 우가리트·아르와드·비블로스·베리투스(지금의 베이루트)·시돈(지금의 사이돈)·티루스(지금의 수르) 등이며 정치적으로 통일된 적은 없고 도시동맹을 결성하여 일찍부터 해상교역을 활발히 하였다. 페니키아인은 서(西)셈계인 가나안계에 속하며 에게계와 키프로스계와의 혼혈로 레반트주민을 형성하였다. 페니키아인들의 원거주지역은 분명하지 않으며 BC 3000년 무렵 이 지역에 이르렀다. 페니키아인을 뜻하는 페니키안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그리스어로는 <붉은 피부를 가진 사람>을 뜻하며, 히브리어로는 <상인>이라는 뜻도 있다.

페니키아는 지리적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만나는 곳에 있어 두 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크레타문명의 영향도 받았다. BC 3000년대에는 이집트와 활발히 교역하였으나, BC 2000년대에 민족이동의 영향으로 혼란스러워지고 중반에는 아리아계·후르리계·셈계의 소도시들이 많이 건설되었다. BC 15세기 무렵 오늘날 알파벳의 원형이 된 페니키아문자가 형성되었다. BC 16세기 무렵 광범위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이집트인이 페니키아지방에 속국(屬國)을 세웠으나 BC 14세기 정치불안으로 지배력을 잃었다. 오리엔트 제국의 교역이 활발해지자 이집트를 대신한 페니키아 여러 도시가 우가리트·비블로스 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창출하였다. BC 13∼BC 12세기 에게해의 민족이동으로 여러 도시가 파괴되었으나, 티루스를 중심으로 부흥하여 지중해 연안 각 지역에 식민시를 건설하는 등 번영을 되찾아 지중해교역을 독차지하였다. 특히 아프리카 북안에 우티카·카르타고, 이베리아반도 남단에 카디스 등의 식민시를 건설하였는데 동방문명을 서방에 전하는 중요한 문화사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카르타고의 건설은 그 뒤 지중해세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밖에 페니키아인은 뛰어난 항해술로 홍해와 대서양에도 진출하여 남아라비아와 통상관계를 가졌으며 BC 7세기에는 아프리카 일주 항해에 성공하였다. 한편 페니키아인은 고도의 건축과 공예기술을 이용하여 헤브라이인과 아랍인의 수도(예루살렘·사마리아·다마스커스 등) 왕궁과 신전 건설에 협력하였다. BC 9세기 아시리아의 침입으로 조공을 바치며 각 도시가 차츰 세력을 잃고 BC 6세기 중엽에는 신바빌로니아의 침입으로 티루스가 파괴되었다. BC 538년 페르시아의 속주(屬州)가 되고 페니키아의 함대는 페르시아해군의 주력이 되어 페르시아전쟁에도 참가하였다. 이 무렵의 중심지는 시돈이었다. BC 333년 알렉산드로스대왕에게 정복되었다가, BC 64년 로마에 정복되어 속주가 되었다. 페니키아 여러 도시는 왕정(王政)으로서 왕은 왕가에 속하는 사람 가운데서 선출하였으며 그 권력은 신관(神官)과 부유한 상인층의 제약을 받았다. 종교는 생산의 풍요를 기원하는 농경종교로서 엘(EL)·바알(Baal) 등을 섬겼다. 레바논의 삼목과 소나무목재, 티루스의 진홍염색포목, 시돈의 자수·금속제품·유리·소금 등을 수출하고 파피루스·상아·철·보석 등을 수입하였다.

페니키아의 지리적인 특징으로 시리아·팔레스타인 미술의 기본 위에 각 지역의 미술이 혼합, 절충되어 그 변천과정은 여러 도시들의 흥망성쇠와 연관이 깊다. 해상교역이 활발하였으므로 원료를 수입하여 가공하는 공예품 제작에 뛰어났다. 상아와 나무의 세공품은 페니키아의 특산물이었으며 금속가공도 널리 알려졌다. 특히 입으로 불어서 만드는 유리공예는 BC 1세기 무렵 시돈에서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축물이나 조상(彫像) 등은 약탈 또는 파괴당하여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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