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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BC 6세기 후반에 고대 오리엔트세계를 통일하여 약 2세기 동안 중앙아시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지배했던 제국. 아케메네스왕조페르시아라고도 한다. 〔역사〕 페르시아인은 메디아인과 함께 서이란족에 속하며 BC 1000년 무렵 이란고원에 당도했다.
BC 6세기 후반에 고대 오리엔트세계를 통일하여 약 2세기 동안 중앙아시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지배했던 제국. 아케메네스왕조페르시아라고도 한다.

페르시아인은 메디아인과 함께 서이란족에 속하며 BC 1000년 무렵 이란고원에 당도했다. BC 843년 아시리아왕 샬마네세르 3세의 비문에 보이는 파르수아(Parsua)가 최초의 기록이다. 그들은 당시 우르미아호(페르시아어로는 우루미예) 남서부에 있었는데 그 뒤 자그로스산맥을 남하하여 BC 7세기 전반에 엘람의 안샨지방으로 들어와 파르사 지방(지금의 파르스주)에 정주하였다. 아케메네스왕조가 페르시아인의 지도자 지위를 확립한 것은 이동중인 BC 700년 무렵이었다. BC 550년 키로스 2세는 메디아왕국을 타도하고 페르시아의 독립을 이룩하는 동시에 고원의 이란계 여러 민족의 이해를 대표하고 있던 메디아왕국의 정치목적을 계승하게 되었다. 첫번째는 서방세계로의 진출로서, BC 547년에 리디아, BC 539년에 신바빌로니아의 정복이 이루어졌다. 두번째는 유목민 침입에 대한 북동(北東)이란 변경의 방위이며 이를 위해 키로스는 중앙아시아에 원정, 마지막으로 사카계 유목민 마사게타이와 싸우다 죽었다. 그의 뒤를 이은 캄비세스 2세는 BC 525년 이집트를 점령하여 고대 오리엔트세계의 통일을 이루었다. BC 522년에 마고스제사(祭司) 가우마타의 왕위찬탈사건이 일어나 귀국 도중 캄비세스가 죽게 되자 아케메네스 일족인 다리우스 1세가 가우마타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초기의 페르시아제국은 키로스 2세와 캄비세스 2세가 정복한 각 국가의 왕으로 즉위함으로써 성립되는 동군연합국가(同君聯合國家)의 형태였으므로 키로스왕통의 단절은 신속(臣屬)민족에 있어 페르시아 지배의 종말을 뜻하였다. 다리우스의 즉위 후 바빌로니아·엘람·메디아·마르기아나가 독립을 꾀하여 페르시아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다리우스는 페르시아 및 메디아 귀족의 지지를 얻어 이들의 반란을 1년 내에 진압할 수 있었다. 그 뒤 그는 인더스지방으로 진출, BC 513년 트라키아·마케도니아를 종속시키고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인지역의 원정을 실행하였다. 그 무렵 리비아의 병합이 실현되어 제국은 최대영역에 달했다. 그러나 다리우스의 공적은 정복보다도 조직자로서의 능력에 있었다. BC 522∼BC 521년의 대반란은 초기 제국지배의 취약성을 나타냈다. 통일을 재건한 그는 신도시 페르세폴리스의 건설과 함께 통치조직의 재편성에 착수했다. 세이트랩(지방장관)제와 세제의 개혁, 흠정(欽定)화폐의 주조, 역전제(驛傳制)와 행정통신체계의 정비 등으로 중앙집권체제는 강화되어 그 뒤 2세기에 걸친 제국 지배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BC 5세기에 들어 이오니아반란을 계기로 그리스와의 대립이 생겨 페르시아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제국의 중요한 문제는 다리우스 말년부터 크세르크세스 1세 초기에 걸쳐 연이어 일어난 이집트반란(BC 486)과 바빌로니아(BC 484 및 BC 482)의 반란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반란을 진압한 뒤 2개 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그 결과 바빌로니아는 페르시아의 수탈을 점점 강하게 받아 피폐하였지만, 보다 멀리 떨어진 이집트에서는 자립의 움직임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BC 480년의 그리스본토원정의 실패와 함께 대외정복전쟁을 끝낸 뒤 페르시아왕의 관심은 제국의 영토유지로 모아졌다. 그와 동시에 전제정치의 폐해도 나타나기 시작하고 크세르크세스는 친위대장 등의 궁중음모로 피살되었다. 뒤를 이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치세 전기에 이집트가 반란을 일으켜 아테네와 함께 페르시아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BC 454년에 반란은 평정되고, 페르시아전쟁 후 계속되었던 아테네와의 적대관계도 BC 449년 <카리아스의 화약>으로 제국의 평화는 유지되었다. 중앙집권체제의 약체화는 다리우스 2 세 아래에서 조성되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시대에 뚜렷해졌다. 그는 BC 401년에 왕위를 노리는 동생 키로스의 군대를 진압하였으나 부왕 말년에 이반한 이집트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치세 말기의 약 10년간은 서부 각주의 세이트랩 반란에 고심했다. 60여 년의 자립 후 이집트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에 의해 재정복되었다. 이 원정에 공적이 있던 환관 바고아스는 왕을 독살하고 그 아들 아르세스를 즉위시켰다가 이어서 아르세스도 죽이고 방계인 다리우스 3세를 왕으로 앉혔다. 다리우스는 바고아스를 쓰러뜨리고 궁정정치 숙정에 노력했지만 곧 밀어닥친 알렉산드로스대왕이 거느리는 마케도니아·그리스군의 침략으로 BC 330년 그의 죽음과 함께 제국은 멸망하였다.

페르시아제국의 영역은 유럽대륙을 훨씬 넘어 언어·종교·사회·경제생활을 달리하는 다수민족을 포함하였다. 페르시아왕은 정복한 각 지역의 기존체제를 이용하면서 새로운 질서 창출에 힘썼다. 키로스 2세는 피정복민족에 대하여 군역과 공납의무를 전제로 내부문제를 간섭하지 않는 정책을 취하였다. 세이트랩제와 세제개혁으로 행정의 조직화를 꾀한 다리우스 1세도 기본적으로는 키로스의 정책을 따랐다. 그는 통일적인 제국법전을 편찬하기보다도 이집트 관습법의 성문화를 채택하는 등 여러민족의 법을 보장하였다. 키로스 2세는 파사르가다에, 다리우스 1 세는 페르세폴리스에 새로운 왕성을 건설하였으나 수사·엑바타나·바빌론도 역시 왕도로 이용하였고, 특히 수사는 사실상의 수도였다. 왕은 정무에 임하여 측근 중신의 의견을 구했지만 중대한 결정사항은 모든 고관이 출석하는 대평의회에 회부하였다. 궁정에서 최고관직은 친위대장(千人대장)이었다. 제국은 20여 개로 분할되어 세이트랩이 주(州)행정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요직은 대부분 페르시아귀족에 의해 독점되었으며 행정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왕궁이나 지방 세이트랩 관청에 많은 서기가 배속되어 있었다. 왕의 비문에는 설형문자인 고대페르시아어·엘람어·바빌로니아어·이집트어가 쓰였는데 관청의 공용문서에는 당시의 국제통용어인 아람어(제국아람어)와 아람문자가 채용되었다. 왕의 명령은 궁정서기에 의하여 아람어로 번역되고 양피지에 기재되어 각주에 송부되었다. 지방관청의 서기는 그 내용을 통역하여 세이트랩에게 전하고 또 현지 언어로 고쳐 공포하였다. 제국 각지의 연락을 위하여 수사를 중심으로 한 주요 도로에 역전제가 완비되었다. 다리우스 1세는 각주의 세액을 은납(銀納)으로 하는 세제로 개혁, 재정확립에 힘썼다. 가장 많이 과세된 지역은 바빌로니아(아시리아 포함)로 은 1300타란톤(약 34t)이었다. 바빌로니아는 그 밖에 또 아시아 여러 주에 할당했던 왕과 페르시아군의 조달물자중 1/3을 부담하였다. 인도는 사금으로 360타란톤(약 9.4t)을 납부하였다. 따라서 모든 주의 총액은 은으로 환산하여 매년 1만 4560타란톤(약 381.4t)에 달하였다. 이 기본세 외에 관세나 도로세, 각지로부터의 공물, 왕령지와 광산의 수익 등이 있어서 수사와 페르세폴리스의 창고에는 막대한 부가 축적되었다. 다리우스는 비축된 금·은의 일부로 화폐를 주조하였다. 당시 화폐의 유통은 그리스·소아시아 서부·페니키아에 한정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이집트는 칭량(秤量)화폐 단계에 있었고 동부 각주는 여전히 자연경제에 머물러 있었다. 페르시아는 원래 군사국가로 성립되고 왕은 최고군사령관이었다. 군사의 중핵은 페르시아귀족으로 구성된 1000명의 친위대와 결원이 끊임없이 보충되므로 <불사대>라 하였던 페르시아병사의 1만명부대였다. 또 왕에 직속하는 페르시아인의 수비대가 배속되어 있었다. 전시에는 제국내 여러 민족의 소집군이 동원되었다. 전투의 주력은 궁시(弓矢)와 창병(槍兵)을 갖춘 보병부대였으나 기병대의 공격력이 뛰어났다. 기병대의 중심은 페르시아인·메디아인 등 이란계 여러 민족이었다. 해군은 페니키아인·이집트인 키프로스와 소아시아연안 여러 민족의 함대로 편성되었다. 초기의 정복전쟁에서 강하였던 페르시아군도 평화가 지속되는 가운데 점차 약화되어 뒤에는 그리스인용병대를 이용하였다. 결국 페르시아가 2세기에 걸쳐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군사력보다는 훌륭한 통일적 지배체제에 있었다. 제국지배가 가져온 평화와 3대륙에 걸친 광역교통로의 정비는 민족간의 경제적·문화적 교류를 촉진하고, 서방으로부터 그리스인의 내방도 활발하여 새로운 세계문화의 성립을 가능하게 했다. 페르시아의 지배는 또 후대에 세계제국의 이념을 남겼다. 아케메네스왕조의 왕호인 <제왕(諸王)의 왕>은 각별하게 이란민족 사이에 제국지배자의 칭호로서 계속 쓰여져 최근의 팔레비왕조의 <샤한샤>에까지 전해졌으며 페르시아의 지배는 세계제국의 이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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