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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미

프톨레미 또는 프톨레마이오스왕조(BC 305~30)
BC 323년에 알렉산드 대왕이 죽자 제국은 여러 장군들의 분할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와중에 이집트 행정수반인 사트라프의 지위를 주장하고 나선 이가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인 프톨레마이오스였다. 그는 BC 305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로 즉위했다. 그의 치세에 대한 비문은 페르시아인들한테서 땅을 빼앗은 그의 업적을 강조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들은 BC 30년에 클레오파트라 7세가 죽을 때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다. 이집트 왕국은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그의 후계자들이 세력 다툼을 벌인 뒤에 나타난 여러 개의 왕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집트는 가장 부유했고, 그후 300년 동안 거의 내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꾸준히 그리스화하고 있는 지중해 세계와 관계를 확고히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알렉산드리아 시의 성장과 그 중요성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왕조가 가진 마케도니아-그리스적 성격은 적극적으로 보존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BC 331년에 알렉산드리아 대왕이 나일 삼각주 북서쪽에 있는 라코티스라는 작은 이집트 마을을 없애고 그 자리에 세운 도시였다. 이 도시는 4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이 건설될 때까지 지중해 동부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이집트 왕국의 수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지 몇 년 뒤에 멤피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졌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가장 번영했던 시대는 초기의 160년 동안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BC 285~246 재위) 때의 문헌적·금석학적·고고학적 증거를 보면, 이 왕국의 행정과 경제가 철저한 개편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또한 농업에서 중요한 혁신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농작물이 도입되었고 광범위한 관개 사업으로 새로운 경작지가 많이 생겨났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는 BC 246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후계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BC 246~ 222 재위)에게 번영하는 왕국을 남겨주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페르시아인들이 가져간 이집트 신들의 신상을 도로 빼앗아와 인기를 얻었다. 에우에르게테스는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BC 222~ 205)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그리스 역사가들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를 나약하고 타락한 통치자로 묘사하고 있다.
필로파토르의 죽음과 젊은 프톨레마이우스 5세 에피파네스(BC 205~180 재위)의 즉위를 둘러싼 사건은 궁정의 음모 때문에 진상을 알기 어렵다. 에피파네스가 왕위에 오른 뒤 10년 동안 남부에서 이집트인들의 반란이 일어나 왕국의 중요한 부분에 대한 왕의 지배력은 약해졌고, 왕을 자칭하는 사람이 잇따라 나타났다. 그후에도 수십 년 동안 분쟁은 계속 일어났다. BC 196년경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해외에 있는 영토의 대부분을 영원히 잃어버렸다. 로제타석에 기록되어 있는 바에 따르면, 이집트인의 감정을 달래기 위해 BC 196년에 소집된 종교회의는 이집트 신전에 대해 광범위한 특권을 부여한다고 선언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BC 180~45 재위) 시대에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가 이집트를 침략해 보호령을 설치했다. BC 168년에 그는 멤피스에서 대관식을 올리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인물을 이집트 총독에 앉혔다. 그러나 그는 로마가 이집트에 대해 보다 강력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했다. BC 168년 여름 로마의 특사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나일 삼각주의 펠루시움 근처에 있는 안티오코스의 사령부에 도착해 이집트에서 철수하라고 안티오코스에게 명령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라이나스는 지팡이로 왕의 주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원 밖으로 나오기 전에 대답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안티오코스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고, 7월말에 안티오코스는 이집트를 떠났다. 필로메토르와 그의 동생(나중에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에우에르게테스 2세 피스콘)의 경쟁은 로마의 중재에 따라 피스콘이 키레네로 감으로써 해결되었다. 피스콘은 BC 145년 필로메토르가 죽을 때까지 키레네에 남아 있었다. 피스콘은 BC 116년까지 누이인 클레오파트라 2세(클레오파트라 2세가 반란을 일으킨 BC 131~130년은 제외) 및 클레오파트라 2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 3세와 함께 이집트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그를 폭군이라 하여 싫어했고, 그의 치세에 대한 역사 기술은 그와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의 험악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1세기 동안 이집트는 로마의 보호를 받아 독립을 유지했다. 이집트의 독립은 순전히 로마의 뜻에 달려 있었다. 이 시기에 로마는 해외 영토가 거의 없고 로마의 이익이나 안전을 위협하겠다는 야망도 전혀 없는 왕조를 지원하는 데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다.
왕이 잇달아 바뀌는 불안정한 시대가 계속된 뒤, BC 80년에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가 왕위에 올라 30년 동안 지배했다. 죽기 전 해인 BC 52년에 아울레테스는 딸 클레오파트라 7세 및 맏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3세(BC 47 죽음)와 왕위를 공유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적극적이고 보기 드물게 유능한 여왕으로, 로마와 손을 잡고 영향력을 키움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명성을 되살리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BC 48년에 이집트까지 폼페이우스를 추격했을 때 로마와 관계를 개선할 기회가 왔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살해당한 것을 알고 이집트에 머물면서 BC 47년에 여왕과 함께 나일 강을 유람하며 관광을 즐겼다. 그가 로마로 떠날 때 클레오파트라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 아이가 카이사르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카이사리온('작은 카이사르')이라고 이름지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후 카이사리온을 데리고 카이사르를 뒤따라 로마로 갔지만 BC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아들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왔다. 클레오파트라는 얼마 동안 로마 장군들의 파벌 싸움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애썼다.
클레오파트라는 BC 41년 타르수스에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찾아가 그와 함께 이집트로 돌아왔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BC 36~30년에 안토니우스의 정적인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장군과 동양 여왕의 유명한 연애사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큰 효과를 거두었다. BC 34년 카이사리온은 공식적으로 클레오파트라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지만 그를 공동 통치자로 삼은 것은 죽은 카이사르의 인기를 이용하려는 책략임이 분명했다. 가을에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과시용으로 자녀들에게 동쪽 영토를 나누어주었다. 로마 대중은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밤마다 소란스럽고 퇴폐적인 연회를 베풀어 알렉산드리아 시민들로 하여금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선전은 무력 충돌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BC 31년 9월 그리스 서부의 악티움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결과는 판가름났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함대가 퇴각했고, 안토니우스도 결국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로 달아났지만 어떻게 할 수 없었고 그로부터 10개월 뒤 승기를 잡은 옥타비아누스가 도착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BC 30년 8월에 자살했다. 안토니우스는 칼 위에 쓰러져 죽었고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게 물려 죽은 것으로 보인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자 그 도시에 보존되어 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해를 참배했는데, 그때 유해를 만지는 바람에 알렉산드로스의 코가 일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의 유해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나는 시체가 아니라 왕을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끝난 것으로 간주된다.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뒤에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이런 상태는 4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속주를 다스린 총독은 로마 황제에게 직접 책임을 졌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에 수도를 그리스 도시인 비잔티움으로 옮겼을 때, 로마 제국은 완전히 쇠퇴하고 비잔틴 제국이 긴 역사의 막을 올렸다.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 바뀐 새 도시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알렉산드리아가 오랫동안 누려온 전통적 지위를 무너뜨렸다.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이집트인들은 대다수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7세기 중엽에 이슬람 군대가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순식간에 이집트를 정복했고 이로써 비잔틴 제국의 이집트 지배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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