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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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이두메아(에돔)의 지도자였던 안티파텔의 두 아들 중 하나. 기원전 44년 로마에서 시이저가 살해되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지역 로마집정관이었던 안티파텔이 기원전 43년 살해되었다. 산헤드린과 안티파텔의 두 아들 사이의 삼파전에서 헤롯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브루터스 일파를 격파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받았다.
기원전 40년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가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일으켜 약 3년간 이스라엘을 지배했다. 반란에 성공한 그는 대제사장 히르카누스 2세(그의 큰 아버지)의 귀를 자르고 파면시켰다. 헤롯의 형제 파사엘은 전쟁중에 자살하고, 헤롯은 로마로 도망했다. 헤롯은 로마에서 두 친구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후원으로 원로원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받았다. 사두개인들이 이를 지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기원전 37년 로마 군대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나서야 겨우 실제적으로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있었다.
헤롯대왕은 무력으로 왕이 되기는 했지만 자신의 왕좌를 늘 불안한 것으로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인 자신을 회피했으며 늘 다윗 왕국의 회복과 진정한 유대인의 왕, 즉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헤롯은 자신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하여 기원전 20년에 성전을 아름답게 단장하고 증축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자신을 정말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으로 보이려는 정치적인 노력의 하나였다. 이 성전 공사는 서기 63년까지 계속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했다. 대제사장이 유대인의 존경을 받는 것으로 보이면 즉시 그를 파면하고 새로운 사람을 대제사장에 임명했다. 베들레헴 부근에서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살해한 것도 이런 잔인한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유대인들과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했지만 로마 제국에서 그는 유능한 정치인이요, 위대한 건축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철권과 검으로 그가 맡은 지역을 탈없이 다스렸고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여 수많은 건물의 건축과 도시 건설에 사용했다.
헤롯의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유대인의 지위는 로마제국 안의 다른 민족에 비해 크게 향상되었다. 유대인들은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았고 별 반대나 제약 없이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사회(디아스포라)를 조직하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자 그의 헬라화 정책을 지지하는 유대인들이 나타났다. 이들을 특별히 헤롯당이라고 불렀다. 바리새인들은 헤롯이나 헤롯 당과는 늘 거리를 두고 다녔으나 사두개인들은 그 정치 도구로 전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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